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석기 체포에 반대한다


먼저

1. 나는 민족주의를 싫어한다

2. 나는 NL은 혐오한다

3. 김정일 개객끼


하지만, 내가 이석기 체포안에 반대하는 이유는, 반국가주의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용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국가를 유지시키는것은 내란모의죄가 아니라 민주적 정당성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중에 우리나라가 싫고 북한이 좋다는 사람 있을 수 있다. 우리나라 따위 전복당하고 북한에 편입되었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다. 이 사람들이 존나 멍청한것도 맞고 이해할수 없는것도 맞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분명히 있고, 이들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이석기이다.

국정원은 그냥 이런 사람들을 지켜 보다가 실제로 행동을 할 때 잡아넣었으면 된다. 실제적인 행동은 민주적인 절차를 위배한다. 하지만, 마음이 맞는 사람 여러명이 모여서 지하에서 모의를 하는것만으로는 민주적인 절차를 위배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법치주의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란 모의죄는 법이 민주주의 위에 있던 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법이다. 민주사회에서 모의를 마는 것 만으로 체포를 할 수 있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는 아나키스트들도 민주적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국가이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좀 더 성숙해지길 바란다.

우리나라 진보운동에서 큰 흐름이 되어 왔던것이 NL이다. 하지만 현재, 진보세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것 또한 NL이다. 또다른 진보가 보았을때 NL이 당면한 큰 두 문제를 말해 보겠다.

일단 NL의 노선에는 두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내부적인 철학 자체의 문제점이고, 다른 하나는 NL이 좌파운동에서 가지는 문제점이다.

일단 내부적인 철학을 보자. 일단 NL의 문제 인식은 현재 남한은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보고, 민족이 자주성을 찾는게 제1 당면과제라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하지 못한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고, 결국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성을 획들할때만 진정한 이상적인 사회가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주성만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북한 문제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잃게된다. NL의 많은 종북주의자들이 이를 보여준다. 그들이 진짜로 북한을 지상낙원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북한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자주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에서 미국에 대항하여 나 핵무기 만들거임 뿌잉뿌잉 하는 나라는 몇개 되지 않는다. 너무 막나가니까 미국조차도 잘 건들지 못한다. 미국에 대항하여 이 자주성은 많은 민족해방주의자들을 설래게 하고 결국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객관적인 시각을 잃는것은 많은 문제를 가져다 준다. 국방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가지게 되는것 자체가 하나의 문제일 것이다. 아직 분단상황에서, 전쟁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다. 모든 무장을 벗고 상대방에게 다가서면 상대방도 포옹해 줄것이라는 강의석의 주장의 옹호론자가 아니라면, 우리나라의 군사력이 필요한건 정말 당연한 사실이다. 문제는 NL에서는 반전을 말하면서, 국방력의 증가를 한반도에 전쟁의 기운을 감돌게 하려는 시도로 본다는 것이다. 일단 우리나라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한, 반전을 위해 최대한 할 수 있는것은 저쪽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국방력을 증대하는 것이다. 중립을 지키려고 국방력을 증대하는 스위스 같이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는 별수 없는 일이다. 민족도 중요하다. 하지만 민족주의의 시선만을 통해 북한을 본다면, 분명 옳은 판단에는 도달 할 수 없다. 

이러한 시선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햇볕정책은 꼭 필요한 정책이다. 북한은 극을 향해 치닫는 상황이다. 체제가 붕괴된다고 할때는 충분히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대한의 전쟁 억지책이 바로 지원정책이다. 이 지원을 통해 얻는 외교적인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쌀 팔아서 무기를 사고, 군의 관료들이 챙긴다고 하지만, 일단 지원을 받았으면 외교에서 한발 물러설 수 밖에 없다. 북한의 군사력을 무시할 순 없지만, 미군이 상주하는 이상 이기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미군 철수라는 진보의 주장과 햇볕정책은 허구라는 수구의 주장이 일맥 상통하게 말이 안되는 것이다.

다른 문제점은 NL이 좌파계열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좌파 운동에서 NL들은 숫자로 밀어붙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쉽게 무시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는 작은 학생사회 운동권부터 정당간의 싸움에까지 적용된다. 가장 큰 예로는 2008년 진보신당이 민노당과 분당하게 된 사건이 있다. 진보는 환경, 노동, 성차별 등등의 많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말할때 뜬금없이 민족이 자주성을 확립해야 한다면서 다른 문제점을 무시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일을 진행한다. 결국 수꼴들의 기득권이 하는 행동이랑 똑같은 행동을 진보진영 안에서 하고 있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가장 큰 문제이다. 진보세력 내부에서만은 우리가 혐오하는 기득권층의 방식의 힘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 해 주고(무차별 상대주의가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한번 들어보겠다고 나서야지 입닫고 귀닫고 앞만보고 가는것은 절대로 좋은 방식이 아니다. 

양자역학에서 필수적인 파동함수를 해석하는 데에는 두가지 시각이 있다. 첫째는 파동함수가 물리적 실체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파동함수 자체가 존재하는것이 아니라 파동함수는 macroscopic하게 관측을 할때 통계적으로 값을 주는 변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즉 이 두번째 주장은, 파동함수는 실제 통계적인 추측보다 많은것을 담고 있으므로 뭔가 정보가 더 있다는 시각이다.

이 논문은 두번째 시각이 틀렸다는것을 증명한다. 증명 자체는 간단하다. 먼저, 어떤 물리계의 실제 물리적 실체를 생각해보자. 만약 첫번째 시각이 맞다면, 실제 물리적 실체는 파동함수를 포함할 것이고 따라서 파동함수가 다르다면 물리적 실체도 다를것이다. 하지만 두번째 시각이 맞다면, 물리적 실체가 같지만 우리가 식으로 쓴 파동함수는 다를수가 있다.

예를들어  \(|\phi> = \frac{1}{\sqrt{2}} (|0>+|1>)\) 의 경우 "얘는 그냥 \(|0>, |1>\) basis로 관측했을때 1/2확률로 1이고 1/2의 확률로 0이 나오는 상태이다." 라는 시각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통계적인 주장은 \(|\phi> = \frac{1}{\sqrt{2}} (|0>-|1>)\)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즉, 우리가 식으로쓴 파동함수가 다른것이다. 이것은 꼭 이런종류의 주장 뿐만 아니라 더 강한 통계적인 주장(파동함수에 대한 정보를 좀더 많이 담은)에 적용된다.

즉, 실제 물리계는 통계적으로 완벽히 기술되는데 반해 파동함수는 통계적인 추측보다 더 많은것을 담고있기 때문에, 뭔가 정보의 잉여가 생기고 따라서 같은 물리계를 기술할수 있는 다른 파동함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논문은 classical analogy를 들어 설명하는데 그것도 덧붙인다.

동전을 던지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고 가정하자. 만약 이때 동전을 던져서 나오는 결과의 통계적 분포가 실제 물리적인 실체고, 동전의 위치, 운동량 등은 실제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가정하자. 두가지 방법 모두 앞면이 나올 가능성이 0이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온 경우 이것이 첫번째 방법을 써서 던진건지 두번째 방법을 써서 던진건지 알수가 없다. 따라서 두가지 방법의 결과가 compatible하다.

즉, 어떠한 물리적 실체가 완벽히 통계적이라면, 그 실체의 특정한 시행에 대한 값은 이것도 가능하고 저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결론은 쉽다. 이제 양자상태를 준비하자. 동전을 던질때와 마찬가지로 두가지 방법으로 양자상태를 준비하자. 첫번째 방법은 \( |\phi_0> = |0>\)를 준비하고, 두번째 방법은 \(|\phi_1> = |+> = (|0>+|1>)/\sqrt{2}\) 를 준비한다. 실제 물리적인 실체과 완벽히 통계적이라면, 측정 결과가 이 두 방법중 무엇을 썼는지 알수 없을 확률이 있을것이다.  그 확률을 \(q\)라고 하자.

그러면 준비는 끝났다. 이 준비하는 기계를 두개를 놓고 그것을 한곳에서 측정하자. 그러면 일단 측정기계에 도달했을때 상태는 \(|0>\otimes|0>\), \(|0>\otimes|+>\), \(|+>\otimes|0>\), \(|+>\otimes|+>\)  네개중에 하나일것이다. 그리고 \(q^2\)의 확률로 네 상태가 compatible할 것이다.

그런데 다음 basis로 측정하는 경우를 살펴보자.
$$
|\xi_1> = \frac{1}{\sqrt{2}}(|0>\otimes|1> + |1>\otimes |0>),
$$$$
|\xi_2> = \frac{1}{\sqrt{2}}(|0>\otimes|-> + |1>\otimes |+>),
$$$$
|\xi_3> = \frac{1}{\sqrt{2}}(|+>\otimes|1> + |->\otimes |0>),
$$$$
|\xi_4> = \frac{1}{\sqrt{2}}(|+>\otimes|-> + |->\otimes |+>),
$$ 
이때 \(|-> = (|0> - |1>)/\sqrt{2}\)이다. 하지만 이 경우 첫번째 상태\(|0>\otimes|0>\)를 basis의 첫번째 원소로 측정하면 결과는 0이다. 두번째 상태는 두번째 원소로 측정하면 0 이고 세번째와 네번째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모순이 발생한다. \(q^2\)의 확률로 우리는 네가지 상태가 모두 물리적 실체와 compatible해야 하는데 측정을 하면 우리는 무슨 state가 맞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물리적 실체가 순수히 통계적이고 상태벡터는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이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논문의 앞 2페이지 요약이고 뒤에는 이것을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서 일반화 시키는 내용과 실험적 오차를 고려하는 상황이다. 요 아래는 개인적인 comment.

이게 contextuallity와 별로 다른 개념은 아닌것 같은데 아직을 잘 모르겠고, 항상 양자역학이 고전적인 해석이랑 다르다는 데에는 entanglement가 관여하는 것을 봐서 뭔가 entanglement가 정말로 고전적으로 nontrivial한 것인것 같다. 뭔가  이와 관련된 공부를 좀 해봐야 할듯.